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만주 전략 공세 작전 (문단 편집) === 관동군의 실책들 === [[파일:external/cdn.theatlantic.com/s_w37_3c21807u.jpg|width=500]] 항복 후 무장해제 당하는 관동군. 소련군이 작전에서 보여준 전략적, 작전적, 전술적 압도를 받아내야 하는 관동군은 너무나도 형편없었다. 소련군의 전략적 기습의 성공에는 관동군 사령부와 대본영이 세운 오판이 한 몫 했다. 대본영과 관동군 사령부 모두 소련이 독소전쟁에서 입은 피해를 감안할 때, 1945년 가을까지는 대규모 군사행동이 불가능할 것이라고 판단을 내렸으며 심지어 1946년 봄까지도 그럴 것이라는 심한 낙관론까지 나왔었다.[* 아주 틀린 말은 아니었다. 문제는 바로 그 정도의 피해를 입고도 견뎌낼 정도의 체급을 가진 나라였기에 '''소련의 기준에서 만주 공세는 중견규모 군사행동밖에 안 되는 일이었다'''는 사실이다.] 사실 다 망해가는 상황에서 소련의 군사적 상황까지 신경쓰기에는 너무 힘들었다고 변호를 해 줄 수는 있다. 문제는 전략적 기습이 작전적 기습으로 나타난 것이다. 왜냐하면 소련이 작전을 시작했을 때 관동군은 그들의 대소전 시나리오 상황이 아니라며 소련군의 공세를 그저 사소한 국경지대 충돌이나 도발이라고 멋대로 판단했다는 것이다. 그 결과 공세 시작날에 야마다 대장은 다롄에 내려가 있었고 제5군은 예흐호에서 회의를 여느라 전방 사령관들을 죄다 불러들인 상태였다. 이에 떨어진 작전적 기습효과는 막중했다. 한편 관동군이 45년에 변경한 대소전 요강은 소련군의 험지 돌파와 종심 기동 능력을 과소평가하고 있었다. 관동군은 1942년까지 핀란드와 독일을 통해 얻은 정보만으로 소련군을 정면공격과 인해전술 이외에는 모르는 3류 군대로 파악했다. 그들이 할힌골에서 주코프에게 어떤 꼴을 당했는지는 이미 잊어버린 지 오래 되었다. 그 결과 관동군은 30년대에 상정했던 방어병력배치를 바꾸지 않았으며[* 사실 진짜 소련군이 인해전술밖에 모르는 삼류 군대였다고 생각했더라면 더더욱 선방어를 피하고 종심에 병력을 두는 배치로 바꿨어야 했다. 그러니까 애초에 관동군의 편제를 바꿀 생각 자체가 없어서 이유를 끼워맞췄다는 것이다.] 험지 방어는 소련군이 험지를 통과하지 못할 것이라는 판단 하에 최소화했고 결국 아예 험지만 노린 소련군에게 아무 힘도 못쓰고 돌파당하는 신세가 되었다. 그것도 모자라서 관동군 사령관 야마다 대장과 제3방면군 사령관 우시지로 대장의 관할권 다툼이라는 황당한 일까지 벌어졌으니 관동군이 폭삭 망하지 않는 게 이상할 정도다. 관동군은 소련군을 삼류라고 착각하고 있었지만 '''정작 삼류는 그들 자신이었다.'''[* 웃긴 건 소련군의 위력을 제대로 판단한 건 다름아닌 '''[[일본군]] 최악의 졸장 [[도미나가 교지]]였다.''' 만주 작전 당시 그는 관동군의 어느 사단장으로 재소집되었는데 소련군의 물량에 겁을 먹어서 소극적으로 대응하다 항복했다.] 불과 1주일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2만 명이 넘는 [[일본군]]이 전사하였으며[* 소련군은 1만명 전사.], 나머지 관동군 병력 60만여 명은 대부분 포로로 잡혀 소련에서 고생해야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